1.
두꺼운 기둥, 긴 가지, 가지보다 더 늘어진 나뭇잎, 보이지 않는 뿌리, 마른 땅, 그 위 무수한 크고 작은 돌들.
“나무는 몇 살일까요?”
“마흔여섯이요”
여자는 눈은 내리깐 채 고개를 끄덕인다
“나무가 어때 보이나요?”
잠시 말문이 막힌다. 여러 가지 말들이 한꺼번에 떠올랐고 어떤 순서로 꺼내야 하는지 하나씩 다시 봐야 했기 때문이다
“무서워 보이네요, 외롭고요, 오래된 나무의 큰 그늘 때문에 서늘해 보이기도 해요. 추울 것 같아서 사람들은 가까이 오지 않지만 사실 가까이 오면 따뜻함에 안도해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쯤은 될까요?”
마지막 문장은 차마 꺼내지 않았다. 적당히 가려낸 말들을 다 뱉었지만 여자는 다시 묻는다.
“또 어때 보이나요?”
말문이 막힌다. 이번엔 할 말이 없어서다. 맞은편 여자는 날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고 나는 눈치에 맞춰 그럴싸한 말을 해주고 싶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못생겼어요..”
쥐어짜내듯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흠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약속된 시간에 그녀를 다시 만났다 간단한 인사를 한 후 그녀는 한 장의 종이를 슥 내민다 두꺼운 종이었고 무늬가 새겨졌다
문질 문질 엄지로 슬쩍 만져 본 것을 그녀는 알아챘을까 그렇다면 좋을 텐데
“알에 금이 갔네요 어떻게 금이 갔을까요?”
나는 검정 사인펜을 들어 선을 슥 긋다가 성의 없이 두 번 위아래로 펜을 움직였고 마저 슥 그어 반대편에 내려두었다
“알이 깨졌네요 그 안엔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집이요"
"집이요? 어떤 집이죠?”
“마당이 있어요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집 같아 보여요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비현실적이게 아름다운 집이요"
“이 집은 어떤 곳인가요?”
“누가 와도 위로를 받아 울음을 터트릴 곳이지만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이에요 이 집이 여기 있는지 아무도 모르거든요 그래서 외롭죠 사람을 기다리지만 누구도 오지 않으니까요 결국 그곳의 가치는 그 집만 알겠네요”
이번에도 마지막 말은 하지 않았다
상담사는 가슴을 펴며 마치 비밀을 알려주듯 말했다
“이 알은..”
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거짓으로 답하지 않았다
질문과 동시에 생각한 이미지들을 가차 없이 내뱉었고 설명에도 꾸밈이 없었으니 나의 말들은 여자가 계속 말하던 무의식이 맞는 셈이다.
2.
경험하지 못한 더위였다. 8평 남짓한 방에 굉장히 오래전부터 있었을 에어컨과 나, 시간에 따라 누런색이 된 에어컨을 하루 종일 틀어두어도 방안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에어컨 가스가 떨어지면 바람이 시원하지 않아 가스충전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업체 3곳에서 전화상담을 받았다. 가장 가깝고 가격이 적당한 곳으로 예약을 잡았다 상담원은 방문 기사가 전화를 할 것이며 요즘 예약이 많이 잡혀있어 방문은 하루나 이틀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당장 와야 한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실낱같은 누런색 바람이 내 숨을 연장해주고 있었다. 같이 사는 룸메이트는 집이 아닌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곳으로 피신을 가 저녁에 들어오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나의 강아지, 아니 개, 이 털 달린 짐승 두 마리가 헉헉대며 나까지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죽어가는 에어컨과 쉬지 못하는 선풍기 바람을 쐬며 한낮의 더위를 겨우 잊고 열대야를 넘기고 새벽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면 헉하고 다시 숨이 막혔다. 정말 이건 너무하다 싶은 날들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방바닥에 누워 가만히 있었다 이 더위는 무엇인가를 되뇌며 가만히 당하고 있었다 그래 하루 이틀 뒤에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밀린 일들을 해치우겠다고 계획하지만 에어컨 수리기사 전화가 오지 않는다 상담 센터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기사님 전화가 안 오네요”
“언제 예약하셨죠?”
“어제요”
“오늘 중으로는 방문 예약전화가 갈 거예요. 요즘 너무 바쁘거든요”
“오늘 중으로는 오는 거 맞죠?”
“네”
“네”
전화는 오지 않았다
다음날엔 외출을 할 일이 있었고 그곳은 춥기까지 해 외투가 필요한 곳이었다 잠시 더위를 잊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방문 예약 전화는 오지 않았고 나도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누런색 에어컨은 폴폴 폴 돌아가고 있었다.
3.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빠는 날 산에 데려갔다 또래보다 걸음이 빨랐다고 아직도 가끔 말한다.
등산을 하거나 나무 무성한 숲을 걸으면 고민하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러면 아주아주 편안한 상태로 투명한 존재가 되는데 이런 기분을 느끼는 이유는 아빠 덕분이라고 몇 백 년이 된 나무 밑에서 생각했다
태풍이 몰아치거나 폭포 앞에 서있거나 서늘한 바위를 볼 때 또는 가늠되지 않는 크기의 해가 지는 것을 볼 때 내가 작아지는 희열과 그래서 먼지가 되거나 아니면 우주의 세포가 되는 기분을 느낄 때 나는 내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안도한다
아픈 곳을 낫게 하는 방법은 간단해요
먼저 허리를 펴고 가만히 앉아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요. 머리를 무(無)로 만들어요, 그런 다음 단전에 집중하면 몸의 아픈 곳이 느껴져요
(사실이다 명상을 할 때 경험해보았다)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면서 단전에 있는 에너지를 아픈 부위에 보낸다고 생각하고 보내세요 그러면 저절로 낫게 됩니다
설명을 듣자마자 해본다 효과가 있는 것 같다
“흐르는 게 보이네요 느낌이 오죠?”
난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라고 생각하면서
호흡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강사들은 거의 없다
초등학교 다니는 막내까지 가족 모두가 요가를 잘 하던 가난한 요가원 한 군데, 회원제로 운영하는 비싼 동네 명상센터 한 군데만이 호흡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
15년 동안 한 일이라고는 몸을 낫게 하는 곳을 찾아 헤맨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호흡을 아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원인모를 고통에 시달리고 헤매며 깨달은 것은 모두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 똑똑이들의 공통점은
“3달이면 낫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주 자신 있게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인 줄도 모른다
4.
아는 동생을 만났다 친하지 않았고 3년 만에 연락이 닿아 만나게 됐다 낮술을 한 친구는 LP 바에 가자고 날 끌고 갔다 오늘 하려던 일이 있었지만 아직 오후니 저녁에 일찍 들어가 끝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이 음악만 나오는 곳으로 한 남자가 들어온다. 검정 머리에 검은색 상, 하의 또 구두마저 검정인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들어와 얼음 잔에 콜라를 따라 마신다 사장이 말한 여섯시가 되면 올 잘생긴 아르바이트생 인가 보다 몇 시간이 흘렀고 친구는 취했다 옆자리에 앉은 50대 남자가 나에게 명함을 주고 나간다 나는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검정 아르바이트생을 따라 나간다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어요”
“어떻게요?”
“혼자서 생각하면 다 할 수 있는 것 들 이에요 누구든지요 길을 정해두고 하라고 하는 사람, 이렇게는 하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병신이에요 배우던 것을 모두 멈추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그러면 할 수 있어요”
“다 그만두라고요?”
“네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영어회화 수업, 글쓰기 수업, 사는 곳, 회사, 만나던 친구들을 끊었다 그리고 집안의 물건들을 버렸다 이제 나는 버리는 것을 주기적으로 한다 눈을 감고 숨을 쉬고 그 어둠 안에서 튀어 오르는 하나를 잡는다 개운하다 뭔가 더 잡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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