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
붉은 주먹을 쥔 남자가 종이 위에 한참 동안 무얼 쓴다
하려던 것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오줌이 급해 화장실엘 가려 한다
몇 걸음 가다 다시 돌아와 가방에 넣어둔 사탕을 꺼내 입에 물고 다시 갈 길을 간다
남자 옆자리에 앉아 바느질하던 여자는 하얀색 모자를 완성한다
여자는 완성된 모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목을 축이러 방을 나섰다
여자의 뒷모습은 빨갛다
열어둔 창문으로 옅은 바람이 분다
불투명한 한지와 바람에 자리가 옮겨진 모자 하나만 방안에 머문다
창밖에 여덟 번째 눈이 내린다
어깨 위에 앉은 눈을 털며 남자가 들어온다 사탕은 없다
차가운 것이 아무렇지 않는지 머리 위의 눈을 본체만체한다
들어온 남자는 쓰려고 하던 글씨는 잊은 채 바닥에서 뒹구는 모자를 본다
어떻게 알고 모자가 처음 놓였을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아, 남자는 모자가 흰 색인 줄은 모른다
남자가 종이 앞에 선다 습관인 듯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고민하다 붓을 든다
아차차 먹이 없다
벼루도 물도 심지어 문진도 있는데 먹이 없다
방안을 뒤진다 샅샅이 뒤졌지만 먹은 나오지 않는다
먹이 사라졌다
남자는 하는 수없이 먹물을 벼루에 붓는다
뻣뻣해진 붓에 먹물을 묻히고 글씨를 쓴다
먹물은 종이에 스몄지만 여전히 먹은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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